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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반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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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지에 실린 반할의 인터뷰입니다.

맨유의 속사정과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가 많네요.


Q. 맨유가 3년 계약을 해놓고는 FA컵을 우승한 다음날 당신을 해고했는데, 이 때문에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드는가?

당시에는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12월, 1월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잘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당시 나는 우드워드와 매주 대화하는 사이였다. 12월에 3연패를 당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탈락한 이후 나는 우드워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 나를 해고한다고 해도 이해하겠소." 맨유 같은 구단에서 3연패를 했으니 말이다. 그때 우드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나는 당신을 결코 해고하지 않을 거요. 신문을 믿지 말고, 자신을 믿으시오." 그랬기에 당시에는 배신감이 들었으나, 이제는 이해되는 면도 있다. 어차피 내가 한 해 후에 은퇴할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당시 무리뉴가 시장에 나와있었다. 무리뉴 또한 좋은 감독이고, 우드워드는 무리뉴 같은 수준급 감독을 오랫동안 보유하고 싶었을 거다.


Q. 무리뉴와의 관계는 어땠나?

무리뉴가 맨유 감독직을 원했을 거라고 본다. 내가 봐도 영국 최고의 자리이니까. 맨유와 계약하기 직전에 토튼햄의 사장 레비가 우리 집을 방문했었다. 나는 토텐햄과 계약할 수도 있었고, 내 부인에게도 토텐햄 스쿼드가 맨유 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맨유를 선택했는데, 그건 내가 언제나 그 나라 최고의 구단을 맡았기 때문이다!


Q. 무리뉴에게 섭섭한 감정은 없는가?

그런 건 없다.


Q. 지금 맨유의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의 발단은 맨유가 한번도 쇄신을 한 적이 없다는 거다. 감독의 팀 빌딩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매년 쇄신이 있어야 한다.


Q. 당신도 선수들을 영입했고, 쇄신을 시도하지 않았나?

맞다. 그러나 늘 원하는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맨유에는 우드워드와 그의 오른팔인 기업발전 책임자 매트 저지라는 사람이 있다. 저지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한번 만나는 관계였다. 물론, 스카우팅 책임자도 있지만, 맨유의 구조에서 주요 결정은 늘 우드워드와 저지에 의존한다.


Q. 그들이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았는가?

나는 맨유같이 강한 구단이라면 어떤 선수라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맨유가 닿을 수 없는 선수들이 꽤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현실이 그랬다.


Q. 앙헬 디 마리아는 당신의 선택이었나?

디 마리아는 나의 선택이었다. 단, 맨유가 아니라 7년전 AZ 알크마르에서 감독하던 시절에.


Q. 그때는 영입하지 못했다. 맨유에 와서도 디 마리아를 원했나? 디 마리아를 영입해서 기뻤나?

만족은 했다. 창조적인 선수였으니까. 그러나 나의 명단에는 다른 선수들이 있었다. 디 마리아는 영국 축구 문화와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입하는 선수가 모두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축구는 팀 스포츠이기 때문에.


Q. 그는 어떤 포지션에서 뛰길 원했나?

나는 언제나 선수들에게 어디서 뛰고 싶으냐고 묻는다. 디 마리아의 경우 대답은 윙, 주로 왼쪽이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그는 왼쪽에서 뛴다. 그래서 처음에는 왼쪽에 기용했다. 그러나 잘하지 못했다. 8천만 파운드 짜리 선수에게 기대할 레벨이 못됐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울릴 다른 포지션을 찾아야만 했다. 왼쪽 윙 이외에도 넘버 10, 세컨드 스트라이코, 오른쪽 윙 등등. 그러자 비평가들은 디 마리아가 너무 많은 포지션을 돌아다닌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그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줬을 뿐이었다.


Q. 맨유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후회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나를 해고한 방식은 끔찍했지만, 내가 접한 문화나 사람들 때문에 영국에서 보낸 시간을 좋아한다. 유머가 많았고, 언제나 감독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존중심을 갖고 있다.


Q. 당시 누가 최고의 선수였는가?

데 헤아가 판타스틱했다.


Q. 필드 플레이어 중에서는?

이건 한참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루크 쇼가 출발이 좋았지만, PSV 전에서 심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어쨌건 쇼는 평균 이상이었다. 에레라도 평균 이상이었다. 에레라의 시작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모범적인 행동과 코칭 능력 덕택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중요한 선수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블린트가 빌드업 플레이에서 좋은 퀄리티를 보여주면서 가장 꾸준히 활약한 선수였다. 마타 또한 창조성을 지닌 좋은 선수였다. 맨유에는 창조적인 선수가 별로 없었으니까. 당시 맨유가 당신들 눈에 "지루한 축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경기 템포를 높이거나 수많은 종패스를 해낼 수 있는 창조적인 선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버스를 주차하는 수비 축구 보다는 나았다고 본다.

우리는 상대방 진영에서 플레이했고, 대부분의 경우 상대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버스를 주차시키는 상대팀을 만나면 창조적인 선수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내가 디 마리아와 데파이 같은 선수들의 영입을 허용한 이유이다. 이들은 창조적인 선수였고, 버스를 주차해대는 팀을 상대하려면, 이런 선수들이 3~4명은 있어야 한다.


Q. 루니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 늙었는가?

미안하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베스트 플레이어 가운데 하나였다.


Q. 루니를 주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나? 루니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나?

훈련장이나 경기장에서 보여준 루니의 프로 정신에 대해서는 당신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장이나 경기장 밖에서는 또 다르다. 내가 루니를 주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경기장 바깥에서의 생활을 컨트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Q. 흥미로운 얘기다. 그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면 그가...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Q. 당신은 왜 맨유가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선수 영입을 과감하게 하지 않는지 이해 안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글레이저 가문 사람들이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인가?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글레이저 가문과 얘기하는 사람은 우드워드이다. 내가 글레이저쪽 사람들과 얘기한 건 어쩌다 그들이 경기장이나 훈련장을 방문할 때뿐이었다. 그건 대부분 중요 경기가 있을 때였고 다행히 우리는 그런 경기를 많이 이겼다. 예를 들어, 리버풀 전 같은.


Q. 성공적인 기술이사 혹은 축구이사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먼저 축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경기 자체, 훈련방식, 준비 경험, 유소년 교육, 스카우팅 등과 같은. 그리고 나서 이런 것들을 조직체계와 결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축구계에 대한 아주 많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술이사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 먼저 이름을 알린 다음 커다란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그 네트워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Q. 지금 맨유가 기술이사로 염두에 두고 있는 후보 하나가 리오 퍼디난드이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그는 훌륭한 선수였다.

좋은 선수였다고 저절로 좋은 감독이나 좋은 기술이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왕년의 선수 인맥의 일원인 솔샤르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일 텐데. 좋은 선택이라는 보장은 없다.


Q. 솔샤르가 정식 감독이 돼서 놀랐는가?

출발이 좋기는 했지만, 매우 놀랐다.


Q. 이유는?

왜냐하면 맨유는 세계 최대 구단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팀에는 낮은 리그에서 한 두 팀을 맡았던 감독이 아니라 경험이 많은 감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Q. 펩 과르디올라도 바르셀로나 B팀 경력만으로 바로 바르셀로나 정식 감독이 됐다. 그리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언제나 예외는 있다. 과르디올라는 최고 레벨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고, 그 포지션은 전술적 지향이 매우 높은 포지션이다. 그리고 그는 내 팀의 주장이었다!


Q. 당신은 일관된 축구 철학을 갖고 있다. 아약스, 바르셀로나, 알크마르, 바이에른 뮌헨 등등. 맨유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나?

처음 맨유에 취임할 때, 맨유 쪽에서 플레이 시스템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Q. 그래서 놀랐나?

그렇다. 다른 구단들의 경우 항상 그런 얘기를 했었다.


Q. 1995년 아약스에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할 때, 팀으로 플레이한다는 게 핵심이었나?

내가 맡았던 팀들은 모두 진짜 팀들이었다. 맨유에서도 팀처럼 플레이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선수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하도록 지도했다. 우리는 늘 같은 시스템으로 플레이했지만, 상대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기는 했다.


Q. 당신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맨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는가?

문제는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팬들이 용납을 안한다. 솔샤르가 아무리 맨유 출신 선수였다고 해도 그들은 바로 결과를 원할 것이다. 축구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맨유 출신이니까 약간의 믿음은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Q. 그렇다면 맨유 같은 빅클럽에서 성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당신의 첫 기자회견을 기억하는데, 그때 당신은 '이 구단은 너무 상업적' 이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그걸 기억한다니 기쁘다. 나는 맨유가 구단의 조직구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 분야와 상업 분야의 균형이 올바르지 않고, 상업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있다.


Q.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내 경험을 말하면, 프리시즌에 미국에 가서 단기간 동안 많은 친선전을 치뤄야 했다. 상업적 측면에서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축구 감독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더라. 미국에서 벌어진 경기를 모두 이겼으니까. 그러나 곧바로 벌어진 스완지와의 리그 개막전에서는 패했다. 선수들이 모두 지쳤거든. 프리시즌이 이 모양이라면 좋지 않다.

선수 영입 과정을 봐도 내가 보기에 맨유는 최고의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유소년 육성도 보자. 맨유의 유스 시스템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 있나? 유스에서 올라온 선수가 몇명이나 되는가?

맨유에는 박사 학위 소지자가 이끄는 매우 뛰어난 경기 분석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팀도 경험있는 기술이사의 지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부서는 1군뿐만이 아니라 유스에서도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린 선수들이 맨유의 철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되고, 1군 진입이 한결 쉬워질 것이다. 이런 것들이 기술이사가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다.

맨유 감독으로서 나는 맨시티, 토텐햄, 첼시, 아스날 등의 선수들의 퀄리티가 더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했고, 우리 선수들의 수준에 맞는 전술적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공간을 촉발(provoking space)시키려고 노력했고, 그것은 영국에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6개월 쯤인가 전에 보니, 그 전에는 항상 압박만 해대던 클롭이 비슷한 짓을 하더라.


Q. 공간을 촉발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마샬과 래시포드의 스피드를 활용하기 위해서 시도한 것이다. 즉각적으로 압박하기 보다는 약간 물러서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버스를 주차시키는 것은 아니고, 중간쯤으로 물러서면 상대 수비수도 우리 진영으로 넘어오게 된다. 과거 내가 이런 방식을 썼던 것은 알크마르에서가 유일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선수들의 레벨이 아주 높지는 않았고, 내가 선수들 레벨에 맞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보자. 최고의 선수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공격 일변도의 시스템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리버풀이 지속적으로 공격해야 할 경우 맨시티 같은 팀 보다도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Q. 왜 그런가?

살라, 피르미누, 마네 같은 선수들은 아게로, 사네, 스털링 같은 선수들보다 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또한, 데브라이너, 실바 1&2, 페난지뉴 같은 맨시티의 미드필더들은 좁은 공간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맨시티가 우승한 것이다.


Q. 당신이 데리고 있었던 선수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최고가 아니더라도 같이 일하기 좋았던 선수 말이다.

루이스 피고. 위너였다. 훈련이나 실전이나 모두 한결 같았다. 루이스 엔리케. 이런 선수들을 가장 좋아한다. 외향적이며, 위너이고, 경기장에서 말을 한다.


Q. 당신 경력에서 최고의 기억을 꼽는다면?

축구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벤치에 앉아있을 때는 아니다. 암스텔담의 운하에서였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백만 인파가 운하에 모였다.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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