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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사람’도 행복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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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양극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와 학교이다. 지난해 6월 통계청이 ‘최근 20년간 수도권 인구이동과 향후 인구전망’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19년 수도권 1인 가구는 직업, 교육, 주택을 이유로 순유입됐다. 2019년에 8만3000명이 수도권으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중 6만4000명이 직업, 2만1000명이 교육 때문이었다. 학업과 경제활동을 가장 활발히 할 시기인 20대의 순유입은 2000년부터 20년간 지속됐다. 


내 친구들도 12명 중 6명이 학업을 이유로 서울에 왔다.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서울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교육을 받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성적 좋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별관리반을 운영했고, 고등학교에서는 기숙사까지 내주었다. 기숙사는 성적이 아니라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배정해야 하지만, 학교 성적을 기준으로 입사생을 뽑았다. 사실상 ‘24시간 특별 관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학교도 사정은 비슷했다. 당시에는 나도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지방대가 ‘인서울’보다 더 ‘잘 나가던’ 시절도 있다. 1986년에 <조선일보>에 실린 학력고사 점수에 따른 대학별 배치표를 보면 서울대 가정관리·미학과와 부산대와 경북대의 영어교육·국어교육과의 점수가 같다. 그리고 고려대 국문·사학·불문학과, 연세대 교육학과와 전남대 영어교육, 부산대 지리교육·역사교육학과의 점수가 같다. 무리하게 돈을 쓰거나 학자금 대출을 받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대신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에서 가까운 대학에 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입시와 교육은 서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인서울’ 아니면 ‘지잡대’로 나뉘는 세상에서 지방에 사는 학생들은 서울을 꿈꾸도록 강요당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인서울’을 몇 명시키는 고등학교인지 따지고 지방대학을 비하하는 용어인 ‘지잡대’가 미디어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자기 학교가 ‘지잡대’냐고 묻는 글이 올라온다. 


국가 지원도 한쪽에 쏠려있다. 지난해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는 충격적이다 못해 한심하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세 대학이 지원받은 금액이 6조5600억 원이라는 게 드러났다. 전국 대학생 4% 정도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전체 교육재정의 10%가 지원됐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은 “경제는 인센티브에 반응한다”고 했다. 토빈이 말한 인센티브 원리는 인간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고 손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생들이 서울로 가는 이유도 인센티브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점수라면, 자기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얻게 될 이익이 지방에서 대학을 다닐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방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은 다 서울로 가라고 나라가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일자리의 양극화
서울과 지역의 교육 불평등이 심화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자리 불평등 때문이다. 수도권과 지방에서는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양과 질 모두에서 차이가 난다. ‘인서울’은 대학에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단비뉴스>는 ‘지방대 위기와 혁신’ 기획 기사에서 국내 최대 규모 취업 플랫폼 중 하나인 잡코리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신입 또는 경력 3년 이하 직원을 뽑는 채용공고의 45.4%가 서울에 몰려있었고, 인천과 경기도를 포함하면 78.9%의 채용공고가 서울을 소재로 한 직장에서 모집하는 것이었다. 10개 중 2개를 수도권이 아닌 나머지 시도가 나누고 있었으며 광주나 경북, 전주, 제주, 강원, 전남, 울산, 세종은 전체 채용공고의 불과 0.5~1.4%만을 차지했다. 


일자리의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지방은 뒤처진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발간한 ‘지역의 일자리 질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보고서는 전체 지역별로 일자리의 질을 수치로 나타내 비교했다. 전국에 252개 시군구가 있는데, 고숙련-고학력-고소득 일자리가 많은 상위 39개 지역 중 82%인 32개 지역이 서울과 경기도에 있었다. 반면 하위 54개 지역에서는 단 1곳만이 경기도 연천이었고, 나머지 53개 지역은 경북, 충북, 전남, 강원 등이었다.


문화생활의 양극화
교육과 일자리에서 겪는 불평등 문제를 감당하고 지역에 남은 친구들은 문화생활의 양극화를 지적한다. 좋은 콘서트나 전시회는 대부분 수도권에서 즐길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표한 ‘문예연감’에 따르면, 2019년 열린 4만4183건의 문화예술 활동 중에 1만3864건인 31.37%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경기도까지 포함하면 44.85%이다. 당연한 결과다. 지역에는 사람이 없으니 문화예술 활동도 수도권으로 집중될 수밖에. 문화생활의 양극화는 다시 지역민들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런 상황에서 생긴 이건희 미술관 건립 파동은 상징적이다. 지자체들은 지방과 수도권의 문화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이때, 미술관을 지역에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지난 7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이건희 미술관을 서울에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건희 미술관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며 남긴 문화재와 미술품 등을 유족 측이 기부함에 따라 짓게 되는 미술관이다. 삼성의 전신 삼성상회가 생긴 도시인 대구를 포함해 제주, 부산, 세종, 진주, 경주, 창원 등 여러 지자체가 지역균형발전 등을 이유로 유치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해당 지자체들을 포함해, 미술계와 시민단체들은 지금도 서울 건립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전히 정부는 서울에 이건희 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입장이다.


의료 서비스의 양극화
초등학생 때 식은땀을 흘릴 만큼 배가 아팠던 적이 있다. 엄마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차에 태우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군산의료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단순한 복통이었다. 나는 치료를 받고 별문제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군산의료원은 전라북도청 산하의 병원으로 성공한 공공의료의 사례로 종종 언급될 만큼 좋은 병원이다. 군산의 경우 군산의료원 같은 병원이 있어 다행이지만, 급한 상황에 갈 병원이 마땅치 않은 지역도 많다. 지난해 는 응급 환자가 발생해도 한 시간 거리인 속초나 강릉까지 가야 하는 강원도 고성의 의료 실태를 보도했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의료취약지 모니터링 연구’에 따르면 권역응급의료센터까지 1시간 넘게 걸리거나 지역응급의료센터까지 30분 넘게 걸리는 인구의 비율이 27% 이상인 응급의료취약지는 총 97곳인데, 그중 서울 지역은 하나도 없다. 인천 2곳과 경기 5곳을 제외하면 나머지 90곳이 비수도권 지역이다. 비수도권의 경우 응급환자가 생겨도 갈 수 있는 마땅한 병원이 없는 지역이 더 많다는 뜻이다.


지역사망자 중 우리 수준에서 가능한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사망하지 않았을 사람의 비율을 나타내는 치료가능 사망률에서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드러난다. 보건복지부는 5년마다 ‘보건의료실태조사’를 발표한다. 2017년 11월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강원도의 치료가능 사망률은 80.7명이고 서울의 치료가능 사망률은 59.1명이다.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가 있었다면 80.7명은 죽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다른 기준을 적용한 데이터에는 서울이 44.6명, 충북은 58.5명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서는 “치료가능 사망률은 의료시스템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라고 설명한다. 즉, 서울과 지역의 의료시스템 격차가, 살릴 수 있었는데 죽어버린 사람의 숫자를 통해 드러나는 셈이다. 


불균형이 이 시대의 불공정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게 스펙’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실질적 평등을 위해 만들어진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전형은 형식적 평등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역차별이라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언론에서는 태풍이 와도, 폭우가 쏟아져도 서울만 벗어나면 ‘다행’이라고 보도한다. 지역민들은 교육, 취업, 문화 등 사실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인식한 채 살아간다. 지역 간 정치·경제·문화·사회적 격차는 지역 간 불공정이 됐다. 


개천에서 용을 나게 하고, 개천에 있는 용뿐만 아니라 가재나 붕어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수도권에 태어난 것 자체로 특권이 되고, 비수도권에서 태어났다고 불균형과 불평등을 감수해도 된다는 건 이 시대가 넘어야 할 대표적 불공정이다. 비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2등 시민’이 아니다. 서울과 지방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다. 입술이 망가지면 잇몸이 시리듯, 지방이 붕괴하면 서울과 수도권도 무너진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을 이제는 비틀어야 한다. 지방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 정치와 제도가 절실하다.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만 국민인 게 아니다. 지방 사람도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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