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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해후라도 눈싸움이라도 거부에 소리 그 가천경자, ‘고(孤·1974)’. 종이에 채색, 38.5×23.3㎝. 천경자의 여성 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우수와 고독이 서린 눈망울, 다문 입술에 걸쳐 있는 은은한 미소가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서울미술관


화가 천경자(1924~2015)는 당대 수퍼스타였다. 큰 키에 하이힐을 신고, 파격적인 의상을 멋지게 빼입은 그는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몰고 다녔다.
화가로서 대중적 인기도 누렸다. 꽃과 여인, 이국적 풍경화 등 원시적이면서 세련된 그림으로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은 여류 화가로 꼽힌다. 1973년 현대화랑에서 열렸던 개인전은 작품과 카탈로그, 엽서가 모두 매진됐고, 마지막 날엔 관람객 행렬이 인사동 골목을 지나 안국동까지 이어 햇살론 대환대출 서류 질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



천경자, '칠면조'(연도미상). 종이에 채색, 65×52cm, 금성문화재단 소장. /서울미술관


하지만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이 모든 것을 바꿨다.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한 94년생 ‘미인도’를 두고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미술관은 진품이라고 반박했다. 절필을 선언한 작가는 1998년 한국을 떠나 2015년 미국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검찰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결론을 냈지만,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미술계에선 천경자를 언급하는 일도 부담스러워했고, 지난해 탄생 100주년 전시도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만 열려 전국은행연합회 신용정보조회서 아쉬움이 컸다.



천경자, '정(靜)'(1955). 종이에 채색, 166×90cm, 부국문화재단 소장. /서울미술관


천경자 10주기를 맞아 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대출전세담보 는 그래서 더 반갑고 귀한 전시다. 생애 마지막 전시였던 2006년 갤러리현대 개인전 이후 20년 만에 열리는 최대 규모 전시다. 천경자 화업 중 가장 주요한 장르인 채색화 80여 점을 집대성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18곳의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자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194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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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언론 공개회에서 한 관계자가 '막은 내리고'를 촬영하고 있다. /뉴시스





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언론 공개회에서 한 참석자가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오랜 컬렉터로서 천경자의 주요 작품을 꾸준히 수집해 온 안병광 서울미술관 설립자(유니온약품 회장)는 “이제는 ‘위작’이라는 단어에 갇히지 말고 예술가 천경자의 작업 자체를 조명해야 한다”며 “전국 각지, 해외에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모으는 데 많은 난관이 있었으나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했다.
7개의 전시 공간마다 작가와 인연 있는 외부 인사들이 글을 써 천경자 화업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생전 그의 기록적인 개인전을 진행했던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은 작가와의 인연을 회고하는 글과 함께 작가에게 선물받은 그림 ‘하와이 가는 길’을 출품해 눈길을 끌었다.



천경자 화백이 본지에 연재한 ‘천경자 중남미 원색기행’ 중 페루편(1979년 6월 16일자) 지면. /조선일보 DB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6). 종이에 채색, 130×162cm, 서울미술관 소장. /서울미술관


꽃과 여인을 주로 그리던 천경자의 예술 세계는 1969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한다. 45세 때 남태평양 타히티로 첫 스케치 기행을 떠난 이후 천경자는 70세까지 13번의 긴 여행을 떠났다. 생전 천경자는 “여성의 몸으로 스케치북 하나 들고 원시의 땅, 미지의 대지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현장감이라는 순간의 아우라가 저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했다. 1974년엔 20년간 재직했던 홍익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대장정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정중헌 극단생활 대표는 “당시 언론사들은 초고속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기획 기사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천경자의 글과 그림을 받아 스케치 기행을 연재하니 독자 반응이 뜨거웠다”고 전했다.



천경자, '길례언니'(1982). 종이에 채색, 46×34cm, 부국문화재단 소장. /서울미술관


하이라이트는 ‘여성 초상화’ 섹션. 머리에 꽃을 얹은 여인을 그린 1974년작 ‘고(孤)’를 비롯해 다양한 여성 초상화들이 나왔다. 천경자는 단순히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깃든 고독과 한(恨), 꿈과 환상을 투영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당당하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독립적 주체로서의 여성을 보여준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천경자가 그린 수많은 여성상은 ‘미인도’가 아니라 ‘여성 초상화’”라며 “미인도는 대체로 남성 화가의 관점에서 곱게 단장한 일종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그린 것이고, 대부분 그 향유층도 남성이었다. 반면 천경자의 여성 초상화는 대부분 주변에 실재하는 모델을 그린 것으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성의 한과 욕망, 불안한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이 뒤범벅된 모습을 솔직하게 담았다”고 썼다.



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 전경. /뉴시스


오랑캐꽃이 만발한 고향 고흥을 그린 풍경화 ‘춘우(春雨)’(1966),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모델로 한 ‘청춘의 문’(1968) 등 대표작을 망라했다. 타고난 글쟁이였던 그의 저서,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풍성한 자료도 볼 수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있다.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이번 전시에 빌려오려고 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출품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년 1월 25일까지. 성인 2만원. 추석 연휴에도 휴관 없이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