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기자]
현행 헌법의 문제점은 정치 현실과 괴리된 대통령 단임제 조항이나 5년 임기 조항 등에만 있지 않다. 이 헌법은 주권자인 국민의 공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금 이 단계에라도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큰 산을 넘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독재자들인 이승만과 박정희를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현행 헌법은 이승만을 몰락시킨 일만 언급할 뿐, 박정희를 몰락시킨 일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에 관한 문제 제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주식시작하는방법
▲ 부마민주항쟁 헌법전문 수록 범시민추진위원회는 10일 부산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정치권에 “부마항쟁을 헌법전문에 수록하기 위한 절차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부
수수료없는증권사 마민주항쟁기념재단
지난 10일 '부마민주항쟁 헌법전문 수록 범시민추진위원회'가 1979년 10월 16일 개시된 민주화 투쟁인 부마항쟁을 헌법 전문에 수록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
주식폐인 10민주항쟁은 각기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군사독재를 퇴출한 하나의 역사적 흐름 속에 있다"며 부마항쟁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촉구했다.
이런 노력은 촛불혁명 얼마 후에도 두드러졌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2018년 3월 22일 문재인 정부가 공개한 개헌안이다. 이 개헌안에서 제시된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거래량분석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첫 구절로 시작한다. 헌법상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이 4·19, 5·18, 6·10과 더불어 10·16을 거쳐왔음을 확인하는 선언이다.
부마항쟁의 참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문제
신규 릴게임 제기의 역사는 꽤 길다. 6월항쟁 2년 뒤인 1989년 5월 24일, 항쟁 관련자들이 최초의 공식 모임을 가졌다. 동년 8월 28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10월 16일에는 부마항쟁 10주년 기념식이 마산과 부산에서 거행됐다.
이런 노력이 국가 시스템에 영향을 준 것은 1997년부터다. 부마항쟁이 지방정부 차원에서 공인되는 현상이 이때 나타났다. 그해 2월 28일, 마산시는 도시의 역사를 담은 <마산시사>에서 기존 용어인 부마사태를 버리고 '부마항쟁'이란 표현을 채택했다. 이듬해 6월 30일, 부산시는 <부산민주운동사>에 '부마민주항쟁'을 수록했다.
중앙정부가 반응한 것은 2010년부터다. 이해 5월 25일, 진실화해위원회는 부마항쟁에 대한 공권력의 진압이 위법했음을 확인하고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2011년 이후에는 국회의원 조경태·이진복·설훈 등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고, 2013년에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10월 13일에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출범했다.
박정희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은 역대급 시민항쟁
부마항쟁의 '1일'인 10월 16일은 지금의 달력에 국가기념일로 표기돼 있다. 2019년 9월 17일 국무회의에서 그렇게 심의·의결됐다. 부마항쟁을 공정히 평가하기 위한 30년간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이를 토대로 부마항쟁을 헌법 전문에 담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절절한 움직임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제는 반응을 해야 한다.
부마항쟁은 지방 차원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이는 수도 서울의 박정희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은 역대급 시민항쟁이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지방적 차원이 아닌 거국적 차원의 대응을 해야 했다. 국무총리 소속인 위 심의위원회가 발간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는 박 정권의 거국적 대응을 이렇게 요약한다.
"계엄당국은 유신 철폐를 외치는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고자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을 최대한 동원했다.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대응은 부산과 마산 지역에 비상계엄과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추가적으로 투입하는 것이었다. 또한 합동수사단을 통해 항쟁 배후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고문·가혹행위 등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부마항쟁은 경찰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 정권은 군대를 동원했다. 이를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위수령을 발동했다. 군대가 행정당국의 권한까지 행사하느냐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군대가 동원된다는 점에서는 비상계엄이나 위수령이나 차이가 없다. 박 정권이 이런저런 군사적 수단들을 동원해 본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응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부지방에서 벌어진 부마항쟁이 박 정권을 그 같은 위기로 몰아넣었다. 전국 방방곡곡이 궐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생산해 낸 셈이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박 정권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점은 10·26사태 전날까지 대책회의가 계속 열린 데서도 확인된다. 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마민주항쟁 기간 동안 청와대에서는 여러 번의 대책회의가 열렸다. 청와대 <의전일지>에 의하면 10월 17일 '서재회의'가 있었고, 이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가 결정되어 국무회의가 소집되었으며, 진압 병력으로 특전사 공수부대 투입이 결정되었다. 10월 18일에도 대책회의가 소접견실에서 열렸다."
10월 20일의 대책회의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노재현 국방부 장관, 구자춘 내무부 장관,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참석했다. 22일의 대책회의에서는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게 하라', '군경 합동 태세를 유지하고 주요 기관이 자체 방위태세를 강화하라' 등의 취지를 담은 급박한 결론이 도출됐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켰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 시내에 등장한 탱크.
ⓒ 연합뉴스
박정희가 죽기 전날인 25일 오후 2시의 대책회의에는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초기 단계 진압에 실패"했음을 지적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음을 인정한 것이다.
군대 투입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이 같은 상황은 정권 내부를 동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관계는 이로 인해 한층 더 악화됐다.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쏘고 감옥에 들어간 김재규가 1980년 1월 28일 작성한 '항소이유 보충서'에 그런 상황이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 현장을 시찰한 직후 청와대에 가서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체제 저항의 성격을 띤 민란이며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사태'라는 취지로 보고했다. 이 보고는 정권 핵심부가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경 대응을, 김재규는 온건 대응을 희망했다. 부마항쟁은 이들의 관계를 파탄시켰다. 이런 견해 차이는 김재규가 10월 26일에 권총을 집어드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최종적으로 박정희를 쏜 것은 김재규이지만, 그를 그 상황에 몰아넣은 것은 부마항쟁이다.
작게 보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쏨으로써 박 정권이 붕괴했다. 그러나 이 일은 부마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졌다. 박정희를 쏜 것은 김재규이지만, 박정희를 쏘게 만든 것은 부마항쟁이다.
부마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양대 독재자 중 하나를 몰락시킨 사건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켰다. 그래서 향후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거울이 되고 귀감이 되는 사건이다. 이런 사건을 헌법 전문에 명기하지 않는다면, 헌법 전문은 실제 역사와 괴리된 공허한 선언이 된다. 생생하고 생동감 있는 헌법이 되게 하려면, '대한국민'의 업적을 헌법 전문에 정확히 명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